2026년 6월 9일 겨자씨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 보기
시작하기에 앞서,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황당한 사태에 대하여 분노한다는 당연한 입장을 밝힌다. 시민들의 참정권은 예외 없이 보장되어야한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그 참정권을 직접적으로 훼손한 초유의 사태다.
다만 필자는 이를 두고 벌어진 시위에 대하여, 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심층적 이해 시도없이 극우 vs 일반 시민, 선동된 대중 vs 식자층 등의 단순한 프레이밍이 SNS를 위시한 여러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문제적이라고 느낀다.
필자의 주변에는 계엄 정국 탄핵시위 참석 경험이 있으면서, 올림픽공원 시위 참석을 고민하는 친구들이 꽤 많다. 실제로 시위에 참여한 친구도 존재한다.
아래의 글은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20대 끝자락에 있는 청년 당사자로서 지금의 사태에 대해 기성 정치 참여자들의 이해가 증대되기를 바라며 작성한 글이다. ‘단언이 아니라 가설’이라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0. 거리에서 던지는 질문
2026년 6월, 서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 3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송파·강남·광진의 투표소 열네 곳에서 투표용지가 동나 유권자들이 표를 던지지 못하고 돌아간 사태에 대한 항의였다.
이 시위의 출발점을 정확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처음 며칠간 깃발을 든 것은 황교안과 전한길 같은 극우 인사들이었고, 구호는 '부정선거'였다. 그런데 주말을 지나며 주축이 2030세대로 옮겨갔다.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성조기를 거두라고 요구했고, "부정선거론자로 매도되는 것"을 경계했으며, 스케치북에 직접 태극기를 그려 들었다. 구호도 달라졌다. "좌우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다.",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하고 당연한 권리다."
이 광경에 대하여, 일부 기성 정치 세력이 가장 흔하게 택하는 처리 방식은 냉소다. "법리도 모르면서 떼쓴다"는 것이다. 공직선거법상 선거를 무효로 하려면 '규정 위반이 결과에 영향을 미쳤음'이 인정되어야 하고, 표를 못 던진 유권자가 결과를 뒤집었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이건 사실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재선거 사유가 아니라는 입장이고, 다수 법조계 의견도 정당 차원의 선거무효 소송은 기각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거리의 "재선거 요구"는 법을 모르는 감정의 분출이라는 진단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같은 국면에서 이들은 공직선거법 제222조·제224조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법리를 직접 인용했고, 법학 교수들도 선거무효·재선거 검토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시위대 일부는 2021년 베를린 사례를 들었다. 이들은 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법이 정한 문턱을 부당하다고 여긴다. 법리적으로 예상되는 결과 자체와 그 과정에 대해 불복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냉소하며 ‘무지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폄하하거나, ‘부정선거 프레이밍에 이용당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20대에 대한 부적절한 대상화다. 현재 20대는 명백히 ‘불복’하고 있으며, 불복에는 언제나 그 나름의 규범이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의 20대의 분노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한다. 왜 '절차적 흠결이 중대하면, 결과에 영향을 끼치든 끼치지 않든 선거는 무효'라는 직관이 이 세대에게 이토록 자명하게 느껴지는가? 아래는 그 규범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여러 층위의 가설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0.1. 법리적 직관과 규범 충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반을 한 번 다져야 한다. 20대의 추론을 분해하면 이렇다. "투표를 하지 못한 사람이 존재한다 → 참정권이, 곧 주권이 침해됐다 → 이 선거는 정당성을 잃었다 → 다시 해야 한다." 이것은 도덕적 삼단논법이다.
한편 법리는 위반이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묻는다. 개인의 참정권 침해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것이 곧장 선거 전체의 무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게 한국 판례의 골격이다. 두 주장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말하고 있다. 한쪽은 권리의 침해를 말하고, 한쪽은 결과의 인과를 말한다.
2021년 9월 베를린 주(州) 선거에서는 투표용지가 모자라거나 다른 선거구 용지가 잘못 배부되고, 일부 투표소에선 규정에 어긋난 복사 용지로 무효표가 발생하는 등 여러 하자가 한꺼번에 겹쳤다. 이듬해 2022년 11월 베를린 주 헌법재판소는 이 선거를 무효로 보고 재선거를 명했고, 같은 날 치러진 연방총선 일부도 뒤에 연방헌법재판소가 별도로 재선거를 명했다.
분명히 해 둘 것은, 독일 법원도 그 하자가 의석 배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따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주의회 의석의 상당수가 그 영향권에 있었다고 추산됐다. 다만 독일은 '결과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음을 입증'하는 것보다는 '흠결이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조사하는 것에 더 큰 방점을 찍었다. 한국의 높은 무효 문턱('실제 영향의 입증')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한국의 높은 무효 문턱은 보편 법리가 아니라 한국이 선택한 기준에 가깝다. 그렇다면 거리의 20대가 가진 "중대한 절차적 흠결 = 무효"라는 직관은, 베를린 헌재가 채택한 것과 같은 규범론에 입각한다. 이 선례를 정파적 재선거 요구로 주장하는 이들 또한 주장의 법리적 타당성이나 합리성과는 별개로 규범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직관의 내용이 보편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직관이 이 세대에게 유독 절대적인 강도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정당성은 보편에서 오지만, 강도는 특수에서 온다. 독일 헌재의 사례는 청년 세대의 이 직관이 옳을 수 있음을 보여줄 뿐, 왜 하필 한국의 2030이 이걸 양보 불가능한 선으로 삼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 글이 파고드는 것은 후자, 즉 강도의 기원이다.
0.2. 프레이밍 덮어쓰기
부정선거 음모론을 든 고령의 극우가 먼저 점화한 운동을, 2030이 며칠 만에 장악해 '참정권·주권'의 운동으로 프레임 자체를 갈아 끼우고 있다. "그러니 순수한 청년 운동이 아니다"라는 식의 깎아내림 이전에 이정도의 화력을 어떻게 불러모아 기존의 극우 프레이밍을 ‘덮어쓰고’ 전향하려는 시도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기존 운동의 프레임을 통째로 덮어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단단하고 보편적인 규범이 이 세대 안에 자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에서 주어진 음모론의 언어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운동을 재정의하는 과정에는, 흔들리지 않는 규범적 좌표가 필요하다. 그 좌표가 바로 ‘절차주의’였다. 초기 주도층이 극우였다는 사실은 절차주의라는 규범이 이 세대에게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에 해당한다고 보인다.
더하여, 나는 "요즘 20대가 원래 이렇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기존의 제도 불신과 음모론적 에너지라는 원료 위에, 청년의 정서가 특정한 프레임으로 '결정화’된 과정에 대해 서술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이어질 가설들은 '청년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운동을 장악할 만큼 강력했던 그 규범이 어디서 왔는가'에 관한 고찰로 해석해주기 바란다. (따라서 이후의 모든 "이 세대는~"이라는 서술을 본질주의적으로 읽는 것 역시 지양해주기 바란다.)
1.1. 절차는 곧 공정이다
첫번째 가설이다. 지금의 20대는 한국사에서 가장 과밀한 평가 경쟁 속에서 자아를 형성한 세대다. 수능, 입시, 공시, 끝없는 취업 전형. 이 세계에서 정의는 단 하나의 형태로 나타난다. 절차다. 같은 시험지, 같은 채점 기준, 블라인드 심사. 결과의 정당성은 오직 절차의 무흠결에서 나온다. 누군가의 합격 여부보다는 모두가 같은 규칙 아래 시험을 쳤느냐가 도덕적 가치판단의 중심에 놓인다.
이 세대의 정치적 원체험을 짚자면 조국 사태(2019)와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2020)을 들어볼 수 있다. 두 사건에서 분노가 촉발된 지점은 '결과'가 아니라 '규칙을 우회한 절차적 특혜' 자체였다. 누가 더 가졌느냐에 대한 결과주의적인 분배 이야기가 아니다. ‘정해진 트랙을 누군가 옆문으로 질러갔다는 것’ 자체에 대한 불복이었다. 공정은 지금의 이 세대에게 분배의 문제이기 이전에 절차의 문제로 학습됐다.
이 인지 스키마(schema: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할 때 사용하는 머릿속의 틀이나 인식 구조)가 투표에 그대로 전이된다고 보면, 많은 것이 설명된다. 투표는 이 세대의 머릿 속에서 시험·채용과 같은 폴더에 정리된다. 같은 규칙 아래 모두가 한 표씩 행사하는 표준화된 절차. 그래서 "표 몇 개가 결과를 바꿨겠느냐, 결과가 같다면 괜찮다"는 인과관계의 법리가, 이 세대에게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들린다. "부정행위는 있었지만 어차피 합격했을 테니 눈감아 주자." 시험의 세계에서 이 명제는 도덕적으로 절대 통과될 수 없다.
부정이 결과를 바꿨든 아니든, 부정이 있었다면 그 시험은 무효다. 투표용지가 동난 선거도 같은 논리 위에 놓인다. 이것이 첫 번째 기둥이다.
1.2. 결과론에 대한 불신
두번째 가설이다. 절차에 대한 가설만으로는 부족하다. 절차와 공정 세계관의 뒷면에는 결과론에 대한 학습된 불신이 있다. 이건 앞의 가설과 짝을 이루지만 작동 방향은 반대에 가깝다. 1의 가설이 절차에 대한 적극적 믿음이라면, 이건 결과 화법 자체에 대한 방어적 경계에 해당한다.
이 세대는 "결과적으로 큰 영향은 없다", "큰 틀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 같은 결과론적 어법이 어디서 동원되는지를 반복적으로 목격해 왔다. 부동산에서, 일자리에서, 공정 논쟁에서, 그 화법은 대개 기득권이 자신의 책임을 소거하거나 변화를 무력화할 때 등장했다.
따라서 "위반이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라"는 법 요건은 이 세대에게 중립적 법리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결과를 보호하도록 설계된 입증책임의 함정으로 읽힌다. 가장 입증하기 어려운 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함으로써, 결국 기존 결과를 지켜 주는 장치라는 의심이다.
이 의심 속에서 결과론의 거부는 무지가 아니라 저항으로 체험된다. 이 세대에게 "그래도 결과는 똑같다"는 말은 설득이 아니라 심리적 지배의 문법으로 들린다. 이 불신이 절차적 절대주의에 정당성과 정서적 연료를 동시에 공급한다. 절차를 지키라는 요구는, 결과 뒤에 숨는 어른들의 화법에 대한 거부의 다른 이름으로 자리한다.
1.3.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인가. 왜 단순한 분노를 넘어 3만 명이 며칠씩 거리를 채웠을까? 이에 대해 설명하려면 다른 층위가 필요하다. 세번째 가설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실상 멈춘 세대에게, 실질적이고 결과적인 정의(이를테면 집을 가질 수 있느냐, 안정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느냐)는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요구한다고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의를 요구해서 그나마 관철할 가망이 있는 유일한 무대가 절차다. "결과는 바꾸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룰은 지켜라." 절차적 공정에 대한 정서적 투자는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과 반비례한다. 통제할 수 있는 게 절차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면, 절차에는 기존의 ‘형식’적 의미 외에 ‘정의의 마지막 거처’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여기서 예상되는 반박을 미리 받아두자. "결과는 포기했다면서, 정작 요구는 재선거 아니냐. 재선거야말로 결과를 다시 뽑자는 가장 결과 지향적인 요구가 아닌가." 일리 있는 지적이고, 운동이 가장 공격받기 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재선거로 바라는 것은 특정 후보의 당선이 아니다. 훼손된 절차의 복원이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으니 법대로 다시 한 번 치르자'는 것은 결과를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요구가 아니라, 깨진 절차를 원상으로 되돌려 달라는 요구에 해당한다. 이 구분이 무너지면 운동은 곧장 정파적 술수로 읽히고, 이 구분이 섰을 때 재선거 요구는 절차주의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 구분은 이 운동의 핵심적인 생존 조건에도 해당한다고 보여지는데, 1인 1표가 이 세대가 가진 가장 순수한 절차적 평등의 의례이기 때문이다. 재산도, 학벌도, 부모도 거기서는 한 표로 환원된다. 모두가 형식적으로 똑같아지는 유일한 순간, 그 마지막 보루에서 법칙이 깨진 것이다. 그러니 항의의 정서적 핵심은 정교한 법리가 아니라 직관적 비명에 가까울 수 있다. "이것마저?"라는 비명이다.
1.4. 시스템이 만든 기대: 투표용지 부족의 충격
그리고 가장 덜 이야기된 층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네번째 가설이다. 이 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다. 그리고 디지털 환경은 단지 20대가 쓰는 ‘도구’가 아니라, 이들의 기대 자체를 주조한 환경이다.
기술철학자 스티글러식으로 말하면, 기술적 환경은 인간의 욕망과 시간 감각과 정상성의 기준을 외부에서 빚어낸다. 매끄럽게 작동하는 앱, 끊김 없는 결제, 자정에 열려 1초 만에 마감되는 예매. 이 환경에서 자란 인지에게 '시스템'의 기본값은 무한하고 정확하다. 시스템은 동나지 않는다. 재고가 떨어져도 화면은 즉시 그 사실을 알려 주고, 대기열은 질서 있게 흘러간다.
그런 인지가 국가의 가장 엄숙한 의례 한복판에서 종이가 물리적으로 떨어졌다는 사실과 마주쳤을 때, 이 충격은 단순 행정 오류로 분류되지 않는다. ‘범주의 위반’이라고 체감된다. ATM에 내가 맡긴 돈이 없다는 통보를 받는 것과 같은 충격. 매끄러운 시스템에 보정된 기대치가 이토록 노골적인 결핍을 만나면, 인지는 두 가지 결론 중 하나로 도약하기 쉽다.
이 정도 무능은 악의이거나, 혹은 신뢰를 통째로 무효화하는 설계 실패라는 것. 이 도약이 바로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부정선거 음모론조차 일정한 흡인력을 갖게 되는 토양이다.
여기엔 슬픈 역설과 인과가 존재한다. 선관위가 투표용지를 선거인 수의 절반 남짓만 미리 찍어 배정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과거 잔여 용지 유출이 부정선거 음모론의 빌미가 됐던 것을 의식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음모론을 잠재우려는 절차적 긴축이 도리어 물리적 결핍을 낳았고, 그 결핍이 음모론의 가장 강력한 실증처럼 소비됐다. 신뢰를 지키려던 설계가 신뢰 붕괴의 증거가 된 셈이다.
이 층위는 기술적 환경이 인간의 개체화와 규범 감각을 어떻게 선행적으로 조건화하는가, 라는 질문과 직접 맞닿는다. 나는 작금의 청년 분노는 정치적 사건에 대한 반응일 뿐만 아니라, 특정한 기술적 환경이 빚어 놓은 정상성 기대가 깨진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1.5. 탈정파성이라는 도덕 자본
지금까지는 규범이 주어졌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마지막 형태, 즉 왜 하필 '절차'와 '주권'이라는 언어를 골랐는가에 대해서는, 외부에서 선택된 결과일 수 있다고 본다. 이건 좀 더 날카로운, 내생적 가설이다.
이 세대는 자신의 분노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학습했다. 거리에 나온 감정은 머지않아 어느 한 정당의 손익계산서로 흡수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책임지겠다"는 말과 함께 끌려가 권력 재편의 연료가 된다. 그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가시적인 무당파성이다. "좌우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라는 선언, 성조기를 거두라는 요구, 전한길과 거리를 두려는 '중도 위치를 자임하려는 노력'은 모두 이 방어의 표현이다.
그런데 무당파성을 유지하려면 주장 자체가 정파적 이득과 무관해야 한다. "재선거를 하면 우리 편이 이긴다"는 결과 기반 주장은 그 순간 도덕적 우위를 잃는다. 어느 진영의 이해와도 즉시 연결되기 때문이다. 오직 절차 기반 주장, "룰이 깨졌다, 그 자체가 문제다"만이 반정파 기준을 통과한다.
절차론은 누구의 승패와도 결부되지 않는, 형식적으로 중립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앞 절에서 재선거 요구를 '결과 번복'이 아니라 '절차 복원'으로 규정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 규정이 무너지는 순간, 이 무당파성의 방어선도 함께 무너진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존재할 수 있는데, '선택된 프레임'이라는 말이, 절차주의가 진심이 아닌 전략적 외피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니다. 전략적 선택과 진정한 신념은 배타적이지 않다. 절차주의가(앞의 여러 층위를 통해) 이 세대의 진짜 신념이었기 때문에, 도덕적 권위를 지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가설은 신념의 진정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여러 신념 중 왜 절차주의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다른 언어들은 정파성의 의심 속에 탈락했고, ‘공정한 절차의 언어’만 살아남았다. 운동이 스스로 음모론과 성조기를 밀어내는 모습은, 이 선택이 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여진다.
1.6. '상상된' 국제 표준
마지막은 증폭 변수다. 이 세대는 국경 안의 판례집이 아니라 글로벌한 정보 흐름 속에서 규범의 기준점을 잡는다. 베를린의 재선거, 미국 2020년 대선을 둘러싼 논쟁, 다른 민주주의들의 선거 분쟁 사례를 직접 소비한다. 그래서 이들의 규범 기준은 한국 대법원의 보수적 문턱이 아니라 '상상된' 국제 표준에 맞춰져 있다.
이 기준점 위에서 한국 법의 높은 무효 문턱은 "내가 무지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뒤처진 것"으로 경험된다. 베를린 사례가 그토록 빠르게 퍼진 이유도 여기 있다. 직관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직관을 추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나라는 이런 경우 다시 한다." 비교의 감각이 전 세계로 확장될수록, 국내 법리의 보수성은 정당성의 결함처럼 보인다.
2.1. 가설들의 결합
이 가설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으며, 적층된다. 시험능력주의가 '절차=공정'이라는 인지 스키마를 깔고(기초), 결과론에 대한 학습된 불신이 그 스키마의 저항 정신을 강화하고(보강), 통제 불가능한 사회가 절차를 정의의 마지막 거처로 만들어 정서적 하중을 싣는다(강도). 디지털 환경이 시스템 결핍에 대한 충격의 역치를 낮추고(역치), 양당을 모두 불신하는 환경이 표현 가능한 언어를 절차론으로 좁히며(형태), 세계화된 비교 감각이 이 모든 것을 정당성의 언어로 증폭한다(증폭).
이 모든 층위가 함께 작동한 규범은 며칠 만에 극우의 운동을 빼앗아 다시 쓸 만큼 강력했다. '덮어쓰기'가 가능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이 덮어쓰기에 대해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으나, 이 글을 작성하는 현 시점에서 필자는 덮어쓰기가 유효했다고 판단한다.)
3. 결론 : 청년들의 요구에 대한 정치적 응답이 '소급적 재선거'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앞서 제시한 모든 가설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필자는 청년 세대의 일원으로서 거리의 청년들을 두고 '법리도 모르는 떼쓰기'라며 호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쪽에는 "위반이 결과를 바꿨음을 입증하라"는 결과주의 법리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중대한 절차적 흠결은 결과와 무관하게 무효"라는 절차주의 규범이 있다. 쟁점은 절차적 흠결이 얼마나 중대해야 선거를 무효로 볼 것인가라는 규범적 다툼이며, 청년들은 이 규범에 직관적으로 강력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 항의가 이토록 거센 이유는, 결과를 통제할 수 없게 된 사회에서 절차가 20대가 손댈 수 있는 정의의 거의 마지막 형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사태를 '프레이밍된 정치 공작' 내지는 '특정 세대의 무지'로 읽는 행위에 반대한다. 두 진단 모두, 한 세대의 규범관이 이전 세대의 규범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 차이를 결함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다.
지금 20대의 규범은 앞선 세대의 규범과 다르다. 지금 청년들의 목소리를 ‘법리적으로 비현실적’이라며 냉소하고 비판할 것인가, 혹은 새로운 규범 논쟁의 개시로 받아들일 것인가. 선택은 듣는 쪽의 몫이다. 후자로 듣고, 이 논쟁에 정치권이 내놓을 수 있는 응답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더하여, 청년들의 요구가 이번 선거의 소급적 재선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도록, 절차 자체를 신뢰 가능하게 재설계하라는 미래지향적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재선거냐 아니냐"의 양자택일 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침해된 참정권에 대한 인정과 함께, 입법 차원에서 절차적 규범을 어느 차원까지 끌어올릴 것인가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민주화 운동과 두번의 탄핵, 응원봉 시위를 거쳐 K-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자긍심이 되었다. 헌데 이 자긍심이 국가 기관의 선거 부실 관리로 인해 훼손되고있다. 다시 한 번 깊은 유감과 분노를 표한다. 우리 모두에게 온당한 자긍심이 다시 머무를 수 있도록, 여야 모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부정선거론과 단호히 작별하고 청년들이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
이 글은 겨자씨신문 오피니언란에 「[기고] 극우도, 무지도 아니다: 청년들은 왜 거리로 나왔나」(2026.06.09)로 실렸습니다.
원문: https://www.gyeoja.kr/news/articleView.html?idxno=2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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