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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치혜 Chihye Noh

노치혜(Chihye Noh)의 개인 아카이브. AI 시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거버넌스, 기본소득, 데이터에 관한 글, 강연, 보고서를 기록합니다.

THINKCRAF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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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
  • 기본소득당 여성위원회 위원장 2025.07–2026.09
  • nonce 엔지니어, 커뮤니티·사업개발 2025.02–2026.08
  • DSRV 사업기획 매니저, 미래금융연구소 연구원 2024.05–2024.12
  • 빗썸코리아 사업개발 매니저, 빗썸경제연구소 연구원 2022.04–2023.10
  • 『디지털자산 시대가 온다』 공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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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및 토론

인간론: 기술적 존재에서 출발하기 | 정치철학 세미나 (2026.07.11)

2026년 7월 11일, 정치철학 세미나 발제(발제문 작성 2026년 6월 25일). 발제 내용을 글로 옮겨 정리했다.


국가론은 언제나 인간론을 전제한다.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국가의 형태와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순서를 거꾸로 하면 전제와 결론이 어긋난다. 그래서 이 세미나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제안했다. 고전 정치사상의 인간론을 버리지 말고 딛고 서서, 그 위에 기술과 인간의 관계라는 새로운 축을 얹어 보자는 것이다.

1. 국가 모델 뒤에는 인간론이 있다

앞선 논의에서 다룬 세 가지 국가 모델을 다시 보면, 각각이 서로 다른 인간론을 깔고 있다. 국가 번영과 주권을 정점에 두는 국가목적형, 이른바 기술공화국 모델(리스트, 카프)에서 인간은 국가에 복무하는 구성원이다.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정점에 두는 가능화 국가에서 인간은 역량의 주체다. 시민의 비지배 자유를 정점에 두는 공화주의형 국가에서 인간은 자의적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시민이다. 어떤 국가가 정당한지를 묻기 전에, 우리가 어떤 인간을 전제하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하는 이유다.

2. 당파성은 인간론에서 출발한다

현대 정치사상의 주요 갈래도 저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고, 그 답이 서로 다른 국가관과 정책으로 이어진다. 자유주의는 인간을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합리적·자율적 개인으로 보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중립적 법치 국가를 요구한다(밀 『자유론』 3장, 로크 『통치론』). 보수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고 정념에 휘둘리는 유한한 것이라 보기 때문에, 급진적 설계를 경계하고 전통과 제도를 잇는 점진적 개혁을 택한다(버크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사회민주주의는 인간을 노동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사회적 유적 존재로 보고, 소외를 넘어서기 위한 분배와 연대의 국가를 그린다(마르크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기독교민주주의는 인간을 환원 불가능한 인격이자 관계 속에 열린 존엄한 주체로 보고, 보충성과 공동선을 받드는 국가를 말한다(무니에·마리탱의 인격주의). 공화주의는 인간을 시민적 덕성을 지닌, 자의적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시민으로 보고 비지배를 보장하는 견제적 국가를 요구한다(페팃 『신공화주의』). 생태주의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이자 미래세대와 자연에 책임지는 존재로 보고, 지속가능성을 책임지는 국가를 말한다(요나스 『책임의 원칙』).

물론 핵심 인간론이 곧바로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으로 다른 입장과 구별되는지를 드러내는 데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3. 비어 있는 자리: 기술과 인간

로크(1689)에서 버크(1790), 마르크스(1844), 밀(1859), 요나스(1979), 페팃(1997)에 이르기까지 고전 인간론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규명해 왔다. 그런데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정치적 인간관의 중심에 둔 사례는 아직 드물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질문이 바로 그것인데도 말이다.

AI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국가의 역할과 정책 방향, 메시지가 모두 달라진다. AI를 '위협'으로 보면 기술을 인간 바깥의 대상으로 두게 되고, 인간을 지키는 보호와 규제 중심의 방어적 국가로 간다. AI를 '인간의 연장'으로 보면 기술을 인간 구성의 일부로 보게 되고, 환경을 함께 설계하는 분배와 설계 중심의 능동적 국가로 간다. 둘 중 무엇이 맞는지를 정하기 전에, 우리는 세 가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인간답다'의 핵심을 노동, 이성, 관계, 역량, 비지배 가운데 어디에 둘 것인가. AI는 그 핵심을 위협하는가, 확장하는가. 그리고 내 인간관은 어떤 국가를 요구하는가.

4. '기술적 존재'라는 새 축

이 축을 세우기 위한 재료로 세 사람을 골랐다. 겔렌은 인간을 본능이 결핍된 존재로 본다. 인간은 그 빈자리를 도구와 제도, 문화로 메워 왔다(『인간』). 스티글레르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인간은 애초에 기술과 함께 진화했으며, 기술은 인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일부다(『기술과 시간 1』). 요나스는 기술이 인간 본성마저 바꾸는 시대에는 미래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책임이 요청된다고 말한다(『책임의 원칙』).

이 세 관점을 고전 인간론에 더하면, '기술과 함께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출발하는 인간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정의된 인간에게 정당한 국가는 기술을 막는 국가도, 기술에 맡기는 국가도 아닐 것이다. 기술이 인간을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 갈지를 시민이 함께 정할 수 있게 하는 국가에 가깝다. 다음 논의는 이 전제에서 국가론을 도출하는 일이 된다.


사전 읽기: 밀 『자유론』 3장 / 로크 『통치론』 / 버크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 마르크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 무니에·마리탱 인격주의 / 페팃 『신공화주의』 / 요나스 『책임의 원칙』 / 스티글레르 『기술과 시간 1』

노치혜 (2026). 인간론: 기술적 존재에서 출발하기 | 정치철학 세미나 (2026.07.11). 노치혜 Chihye Noh | THINKCRA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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