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2일(수), 기본소득당 AI 연구모임 8월 세미나. 발제 노치혜, 지정토론 서태성. 발제 내용을 글로 옮겨 정리했다.
건강보험 데이터 민영화 논란은 대개 '개방할 것인가, 막을 것인가'의 구도로 다뤄진다. 이 발제에서는 그 축을 옮겨 보자고 제안했다. 쟁점은 데이터 거래를 금지할지가 아니라, 이미 발생하고 있는 데이터 수익을 어떻게 나누고 원천으로 어떻게 되돌릴지다. 지금 한국의 어느 법에도 데이터 유통 수익을 나누는 기준은 없다.
1. 두 개의 시계
건보 재정과 데이터 개방은 흔히 하나의 이야기로 묶인다. 재정이 어려우니 데이터를 열어 돈을 만들려 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둘은 인과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속도로 도는 두 개의 시계에 가깝다.
건보 재정의 시계는 이렇다. 2024년 진료비는 116.3조 원으로 2020년보다 33.7% 늘었다. 2026년 재정수지가 적자로 전환되고(의료개혁 반영 시 5.2조 원), 2029년에는 누적 준비금이 소진되며, 2032년에는 보험료율이 법정 상한 8%에 닿고, 2035년 연간 적자는 39.5조 원에 이를 전망이다. 데이터 개방의 시계는 다르게 돈다. 디지털헬스케어 입법 시도는 2006년부터 20년 가까이 표류했고, 2024년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 사업(6,065억 원)이 착수됐으며, 2026년부터 유전체 데이터가 단계적으로 외부에 공개되고, 디지털헬스케어법 단일안은 2026년 하반기 제정을 목표로 한다. 이 데이터 개방 법제는 재정 대책으로 발의된 적이 없다.
건보 적자는 정책 실패라기보다 수입 상한과 고령화 지출이 만든 구조적 결과다. 수입은 보험료율 상한과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묶여 있고, 국고지원은 법정 20% 대비 실제로는 13~14%만 집행된다. 지출 쪽에서는 65세 이상 1인당 진료비가 전체 평균의 3배를 넘고, 2030년대 중반이면 노인 비중이 30%에 이른다. 재정을 움직일 수 있는 정책 수단, 즉 국고지원 법정비율 준수, 보험료율 조정, 비급여·실손 관리, 지불제도 개편, 부과체계 개편 가운데 데이터가 직접 움직이는 수단은 없다.
그럼에도 데이터가 쟁점이 된 것은 정치경제 때문이다. 재정 지속가능성 담론이 민간 활용의 명분이 되고, 산업계의 개방 요구가 빨라지자 약 500개 단체가 '건강보험 빅데이터 민간개방 저지 공동행동'으로 모였다. 재정 압박은 개방의 원인이 아니라 정치적 연료로 작동한 셈이다. 그리고 양측 모두 '개방할 것인가'를 축으로 대립하고 있다. 축을 옮기면 제3의 논의 공간이 생긴다.
2. 기록에서 원형이 된 데이터
축을 옮겨야 하는 이유는 데이터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AI 모델은 염기서열을 읽고 해석하는 단계를 지나 설계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2026년 Nature에 실린 유전체 파운데이션 모델 Evo 2는 9.3조 개의 염기쌍을 학습해 박테리아 게놈 규모의 새 서열을 설계하고, BRCA1 같은 인간 변이의 병원성을 예측한다. 인간 게놈 전체를 생성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지만, 학습 대상이 행위의 기록에서 생명의 설계도로 옮겨 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 사람만을 위해 설계된 유전자 치료도 이미 현실이다. 2025년 미국 CHOP과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130만분의 1 확률의 희귀질환을 가진 아기의 변이에 맞춘 염기교정기를 약 6개월 만에 설계해 투여했다. 개인의 유전체가 치료 설계의 직접 입력값이 된 것이다. 이때 유전체 데이터의 가치는 연구용 통계가 아니라 개인별 치료 설계에서 나온다. 집합적으로 익명화했으니 개인의 권리는 소멸한다는 논리로는 이 상황을 정당화할 수 없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과 생명윤리법은 데이터를 행위의 디지털 흔적, 즉 기록으로 전제한다. 그래서 갈등은 보호(프라이버시) 대 활용(산업)의 구도가 되고, 익명화하면 개인정보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런데 유전체는 데이터 자체가 원본이다. DSI(디지털 염기서열 정보)만으로 생명체를 재구성할 수 있고, 재식별 가능성은 늘 남아 있으며, 가족과 집단까지 연루된다. 유전체는 개인정보보호법 밖에 있고, 물질을 전제로 설계된 생명윤리법에도 포섭되지 않으며, 국제 규범도 답을 내지 못했다. 세 층위 모두에 공백이 있는 상황에서 '보호 대 활용'의 이분법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3. 세 갈래의 국제 경로
유전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은 세계적으로 세 갈래로 나뉘었다. 중국은 인체유전자원을 국가 전략자산으로 규정하고 채취와 보존, 반출, 국제협력을 전면 허가제로 묶었다. 주권 자산화다. 미국은 연방 차원의 포괄 규율이 없고 시장에 맡겼다. 그 결과 23andMe가 파산하자 고객 1,500만 명의 유전정보가 파산 재단의 자산으로 편입되어 경매에 올랐다. 개인에게 남은 권리는 삭제 요청뿐이었고, 약 190만 명이 그 권리를 행사했다. 규율의 공백이 곧 경매 대상이 된 것이다. EU는 공적 게이트를 택했다. 유럽보건데이터공간(EHDS) 규정에 따라 회원국별 보건데이터접근기관이 2차 활용을 심사하고, 유전·분자·임상시험 데이터는 다른 데이터보다 2년 늦은 2031년 3월로 적용을 별도 유예했다.
EU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데이터 종류별로 권리와 적용 시점을 달리하는 체계가 이상론이 아니라 이미 시행 중인 제도라는 점이다. 재식별 위험과 가족·집단 연루, 규율 난도가 유형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아직 세 경로 중 어디에도 서 있지 않다. 선택하지 않으면 기본값은 시장 처분, 곧 미국의 경로가 될 가능성이 크다.
4. 한국의 위치
한국은 '데이터 강국'으로 불리지만 그 평가는 청구·검진 축에서만 성립한다. 단일보험자 체제와 전 국민 강제가입 덕분에 표본 편의가 거의 없고, 심사평가원에는 약 2조 8천억 건의 의료 빅데이터가 쌓여 있다. 반면 유전체 축은 후발주자다.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 참여자는 2026년 6월 기준 약 17만 명으로, 2032년 100만 명 목표까지 하루 평균 1,000명의 기증이 필요하다. 금융 마이데이터는 이용자가 1.6억 명에 이르는데도 사업자 9곳 이상이 라이선스를 반납했다.
개방 일정은 정치적 논쟁과 무관하게 이미 진행 중이다. 실제 규칙은 법률 본문보다 시행령과 고시 단계에서 정해진다. 그런데 분배와 주권에 관한 보장은 비어 있다. 공백은 세 층위다. 전송요구권은 있지만 데이터 유통 수익의 배분 기준이 없는 분배의 공백. 개인 단위의 동의와 전송만 규정할 뿐 신탁이나 협동조합이 집합적으로 동의하고 교섭할 지위가 없는 집합적 권리의 공백. 그리고 유전체처럼 데이터가 원형이 되는 유형을 다룰 틀이 없는 신유형 데이터의 공백이다. 세 공백은 서로 다른 법에 흩어져 있으므로, 하나의 특별법보다 개별 조문 개정 세 건으로 나눠 푸는 편이 현실적이라고 본다.
5. 제안: 유형별 권리체계와 수익의 환류
첫 번째 제안은 데이터를 세 계층으로 나누고 계층별로 권리를 차등 부여하는 것이다. 청구·검진 기록이나 웨어러블 데이터 같은 행위기록형(L1)은 행위의 파생물이므로, 가명처리 후 거래를 허용하되 수익의 일정률을 기금에 납입하게 한다. 인체유래물에서 나온 정보나 검체 기반 임상정보 같은 신체유래형(L2)은 신체의 연장이므로, 목적을 제한해 거래하고 결사체와의 교섭을 의무화한다. 유전체와 염기서열, DSI 같은 원형설계형(L3)은 생명의 설계도이므로, 양도는 불가하고 이용허락만 가능하게 하며 상업적으로 이용할 때 기금 기여를 의무로 하고 재식별 시도는 형사 규율한다. 계층이 올라갈수록 거래의 자유는 줄고 환류 의무는 강해지는 구조다.
두 번째는 소유권과 수익권을 나누는 것이다. 지금의 가치사슬은 환자에서 병원과 플랫폼, 비식별 처리, 제약·보험·AI 기업으로 이어지는데, 원천으로 돌아오는 분배는 0이다. 소유권은 개인과 공동체에 남겨 귀속 다툼을 피하고, 수익권만 분리해 결사체가 집합적으로 행사하게 하자는 것이다. 배분은 개인별 정산이 아니라 기금형 정액 배당으로 한다. 개인별 데이터 가치를 평가할 모델이 없다는 현실을 전제로 한 설계다. 선례도 있다. DSI 상업 이용 기여금의 50%를 원주민과 지역공동체에 배분하는 생물다양성협약의 칼리 기금, 음악저작권의 집중관리 방식, 알래스카 영구기금과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그렇다. (이 부분은 비판과 논의를 특히 환영한다.)
세 번째는 그릇을 먼저 만드는 일이다. 데이터 신탁은 해법이 아니라 예시에 가깝다. 현행법에는 데이터 신탁의 법적 지위도, 집합 동의와 교섭의 근거도, 수탁자의 의무도 없다. 배당 조항을 만들어도 그것을 받을 주체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정보보호법 제35조의3의 개인정보관리 전문기관 정의를 넓혀 비영리 결사체와 협동조합을 포섭하고, 디지털헬스케어법 단일안에 활용 수익의 일정률을 기금에 납입하는 환류 조항을 신설하며, 생명윤리법에 DSI와 원형 데이터 유형을 신설하고 재식별 시도를 규율해야 한다. 데이터 권리 논의가 전송요구권(제35조의2)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데이터가 원형이 되는 시대에 분배 규칙은 나중의 문제가 아니다. 개방의 일정은 이미 정해졌고, 규칙은 지금 시행령과 고시에서 쓰이고 있다.
주요 출처: 국회예산정책처 「의료개혁 1·2차 실행방안을 반영한 건강보험 재정 재추계」(2026.6), 개인정보보호위원회·보건복지부(2026), Regulation (EU) 2025/327(EHDS), Arc Institute·NVIDIA Evo 2(Nature, 2026), Musunuru et al.(NEJM, 2025), CBD COP16 결정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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